핑퐁 대화가 되지 않는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 남편도 함께 대화를 하려고 하면 정형인 입장에서는 너무 명백히 대화를 시작한 사람이 끌고 가고 싶은 방향이나 의도가 있는데도 전혀 그 부분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를 몰고 가거나 요점을 흐트려서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을 황당하게 하거나 화가 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서 알기 전에는 이러한 부분들이 저를 굉장히 화나게 해서 바로 싸움이 나기 일쑤였었죠. 하지만 지금은 남편이 나쁜 의도는 없고 대화 하다가 하나 '꽂히는' 게 있으면 대화의 원래의 흐름이나 주제와 상관 없이 자기가 꽂힌 부분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는 다른 뇌 구조 때문에 그런 것을 알기에 바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핑퐁 대화'를 간절히 원하고 필요로 하는 정형인인 제 입장에서는 매우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요.
가령 오늘 남편과 점심 식사를 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있지 루비가 다음 달에 루카스(루비의 큰아들. 4살) 데리고 싱가폴에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같이 가고 싶은지 물어보더라구."
여기서 배경 설명을 잠깐 하자면 루비는 남편과 함께 아는 친구로, 루비의 남편은 제 남편과 고등학교때부터 알고 지내는 친구 사이입니다. 루비는 저와 통하는 게 많아서 저와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루비의 남편도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저를 통해 남편의 아스퍼거에 대해 루비도 알게 되었기에 굉장한 절친이 되었습니다. 예상되시겠지만 루비의 남편도 아스피적인 성향 때문에 어디에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기까지 해서 큰아들 작은딸을 모두 데리고 남편까지 함께 여행을 가기는 어려운 상황이기에 루비는 큰아들만 데리고 여행을 하기로 결정하고, 제게 동행을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말을 화두로 꺼냈을 때에는 당연히 저도 그 여행에 관심이 있기에 제가 딸을 데리고 루비네랑 그 여행을 간다면 어떨지 남편의 의견을 묻고 싶은 것이었겠지요. 이 부분은 정형인들이라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너무 당연히 파악이 되는 부분일 것이죠.
그런데 루비네는 요즘 새로 집을 지으려고 계획 중입니다. 아스피인 제 남편의 특별한 관심 분야는 다름 아닌 '건축' '집수리' '레노베이션' 등이어서 루비네의 새로운 집 건축 계획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루비가 제게 여행 제안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스피인 제 남편의 뇌 속에서는 '싱가폴 여행'이라는 주제는 들어오지도 않고 '루비'라는 이름에서 바로 '루비네 건축'이 떠올랐고, 제 말은 소리로 들었음에도 제가 한 말에 대해 어떤 답변이나 의견제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관심 분야인 '건축'에 꽂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상태가 됩니다. 마치 우영우가 모든 순간에서 고래 생각을 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제 남편은 제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루비네는 집 언제 이사 나간대? 건축 시작하려면 이사 가야 하잖아."
위의 배경 설명을 제외한 대화의 흐름을 본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있지 루비가 다음 달에 루카스(루비의 큰아들. 4살) 데리고 싱가폴에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같이 가고 싶은지 물어보더라구."
"그래서 루비네는 집 언제 이사 나간대? 건축 시작하려면 이사 가야 하잖아."
네.... 그렇습니다. 핑퐁 대화가 불가능하죠.
이 상황에서 전같으면 저는 답답해하며 화를 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남편에게 설명합니다.
"자기가 루비라는 이름을 들으면 자기 관심 분야인 루비네 집 건축을 떠올리는 건 알겠어. 자기가 아스피니까 그런 거고 그건 자기 잘못이 아니야.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을 꺼낸 게 아니고 정형인인 내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에 대해 피드백이 안 돌아오는 대화를 하고 있으면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답답하고 싫어."
그럼 남편은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그리고 그 때의 기분에 따라 제 말을 이해하고 다시 대화 주제로 돌아오기도 하고, 때로은 이런 커멘트를 여전히 공격이라 생각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합니다. 후자는 전형적인 아스피들의 반응인데 사실 그런 반응을 보이면 저도 기분이 상해서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져 버립니다. 정말 필요한 대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뒤에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죠.
오늘은 남편이 화를 내거나 방어를 하지는 않았지만 제 말을 알아 들은 뒤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싱가폴 여행을 간다는 거잖아? 싱가폴을 가는 이유가 도대체 나는 이해가 안 돼. 우리는 전에 이미 갔던 여행지고 애랑 둘이 싱가폴을 가서 뭐 재밌는 일이 있겠어. 그냥 더 이상 이야기 할 가치가 없는 주제라고 생각해."
네... 그렇습니다. 주제로 돌아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남편은 너무나 솔직하게 전혀 제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뾰족하게 이야기를 하죠. 남편이 아스피라는 것을 모를 때에는 너무 상처받고 화가 났겠지만, 이제는 그렇지는 않구요.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지는 않기 때문에 저도 더 이상 대화를 나쁘게 이끌어 가고 싶지 않아서 그냥 대화를 종료하게 되더라구요. 적어도 싸우지는 않았다 생각하면서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대화가 어느 정도 이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특히 주제가 남편의 관심 분야이거나 매우 실용적인 주제인 경우에 그렇죠.
이렇게 아스피 배우자와 살아가는 것은 매순간이 삐걱거림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로 싱가폴 가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더라도 이 대화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방법도 많을테지만 아스피인 제 배우자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죠. 핑퐁대화가 주는 즐거움도 기대하기 어렵구요. 티키타카, 꽁냥꽁냥, 알콩달콩은 사실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너무 지독하게 솔직한 것, 뇌구조가 다른 것이 문제일 뿐, 오늘도 제 남편은 저와 딸을 위해 새우를 직접 손질해서 파스타를 요리하고 정성스레 브로콜리를 삶아 꽃처럼 장식해서 선사합니다. 묵묵히 설거지를 대신 해 주고 제가 바쁠 때 딸을 학교에서 데려다 주는 것도 빼놓지 않습니다. 말을 예쁘게 하는 것, 알아서 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할 줄 모르지만 저를 사랑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약간의 살얼음판을 디디는 것 같은 순간이 있을지언정 이 관계와 가정 속에서 사랑과 안정감과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그 살얼음판을 디디는 것 같은 삐걱거림은 다행히 남편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제가 다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 관계 속에서 공존하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깨닫게 된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아스피 파트너, 혹은 배우자, 가족 구성원과 원활하지 못한 소통으로 마음에 상처가 있으셨나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이해한다면 그 상처를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명하게 관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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