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 중 한 사람이 자폐스펙트럼에 있는 커플, 뉴로다이버스 커플의 경우 매일 갈등에 부딪힙니다. 뇌구조가 다르니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대화가 안 되니 이를 해결할 수도 없고 문제는 점점 악화되기 마련이죠. 뉴로다이버스 커플이라면 커플/부부 상담을 고려하거나 받아 본 경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뉴로다이버스 커플의 경우, 일반적인 부부상담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독이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보통 부부/커플 상담을 위해서는 부부/커플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상담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뉴로다이버스 커플과 같은 특수한 경우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상담사가 자폐스펙트럼, 특히 고기능 자폐스펙트럼 즉 아스퍼거증후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첫 번째 문제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아스퍼거증후군에 대해서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친밀한 인간관계 특히 커플이나 부부관계에서 야기하는 문제점과 해결책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두 번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정형인-아스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양상과 원인, 그에 따른 해결방법은 정형인-정형인 사이의 관계에서의 문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정형인-정형인 커플/부부의 경우, 서로 감정이 상하고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은 주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언행을 고의로 한다거나, 한 쪽이 바람을 피운 경우 등이 있을 것입니다. 한 쪽이 잘못을 한 경우라면, 유책 당사자가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 개선의 의지가 없거나, 무슨 이유에서든지 고의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주거나 사과를 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며 갈등이 깊어지는 양상을 보일 것입니다. 보통은 두 사람 모두에게 어느 정도 유책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인데, 이 때 두 사람 모두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고 상대방에게 고의적으로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며 다툼이 발생하는 상황이겠지요. 어떤 상황이든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상호적입니다.
하지만 정형인-아스피 커플/부부의 경우, 전혀 다른 갈등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우선, 정형인 배우자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를 겪고 격앙되어 있느 반면, 아스피 배우자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로다이버스 커플의 갈등 원인은 두 사람 각각이 필요로 하는 정서적 교류, 친밀감에 대한 수준이 매우 다른 것에서 시작합니다. 정형인 배우자가 커플/부부라는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주고 받기를 원하는 정서적 교류, 이해, 친밀함, 애정은 아스피 배우자에게는 사실상 필요하지 않거나, 다르게 발달된 뇌구조의 특성상, 너무 과하거나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특별히 갈등이 발생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형인 배우자가 일상적인 문제를 아스피 배우자와 논의하려고 하거나, 대화 중 공감을 얻으려고 하거나, 애정 표현을 하는 경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아스피 배우자는 이러한 상황들에서 이에 필요한 상호적 반응이나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예민한 감각문제로 신체접촉을 거부하거나, 눈빛을 피하는 등 정형인 배우자가 자신의 요구와 필요가 무시되고 거부 당했다고 느낄 수 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정형인 배우자는 당연히 슬픔과 실망, 나아가 이것이 반복되면 분노와 미움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이를 상대방에게 표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감정들이 표현될 경우,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느끼는 아스피 배우자는 더더욱 굳게 닫힌 문처럼 교류를 거부하고 상대방을 내치게 됩니다. 물론 아스피 배우자 역시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 기제로 교류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형인 배우자는 훨씬 더 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정어린 교류를 원했던 감정이 원인을 알 수 없이 무시되고 거부 당한 것으로 인한 슬픔, 나아가 그것을 이해받고자 설명을 함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자신을 내치기만 하는 상대로 인한 답답함과 좌절감.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매번 반복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분노와 미움. 기본적으로 교류와 이해를 통해 애정을 확인하고자 하는 정형인 배우자에게는 이것이 감정적, 정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스피 배우자는 교류를 피하고 차단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필요를 달성하였지만, 정형인 배우자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고, 점점 더 커지는 욕구와 필요가 반복 지속적으로 좌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담사를 찾게 될 때 쯤, 정형인 배우자는 미치기 직전일 수도 있겠죠. 자신의 정서적 필요, 욕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생긴 해결되지 않은 터질 것 처럼 부푼 문제 덩어리를 안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아스피 배우자는 그때 그때 셧다운을 하고 자신의 바운더리를 잘 지켰고, 상대방이 괴로워 하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훨씬 침착한 모습을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상담사에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정형인 배우자는 처리되지 못한 감정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며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울음을 터뜨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아스피 배우자는 아무런 고의도 없었으며 자신은 그저 이성적으로 반응했을 뿐이라고 담담히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스퍼거증후군과 그것이 커플/부부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르는 상담사는 감정이 격앙되어 있느 정형인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이지만, 수많은 부부상담에서 제가 좀 더 침착하게 상황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부부 상담 전문가들은 저희 커플을 보고, 무딘 남편도 좀 더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더 노력을 하거나 변화해야 할 사람은 감정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는 저라고 충고했습니다. 상황을 들어 보면 남편은 갈등이 격해지는 상황에서 자리를 피하거나 입을 다문 것 뿐이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거나 며칠동안 이런 감정이 해소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저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형인-정형인 관계를 보는 렌즈를 통해 본다면 위와 같은 조언들이 정답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정형인이라면 그 관계를 이어갈 의지가 없는 단계가 아닌 한, 관계 개선을 위해 자연스럽게 상대방과 어느정도 상호적인 교류를 하게 되고 그것이 싸움과 다툼일지언정 주고 받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경우 자연스럽게 감정 해소가 되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시원하게 울거나 화를 내고 나면 마음이 풀리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여기서 '시원하게'라는 것은 그러한 감정적 분출이 있을 때 감정이 충분히 표출이 되고 이러한 표출이 상대방에게도 영향을 미쳐 상응하는 피드백이 있어서 화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한 쪽은 이미 침착하게 감정 해소가 되었는데 상대방은 전혀 해소가 되지 않아 계속 터질듯한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가 계속 장기화된다면 그 사람이 감정 해소 방법을 모르거나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배우자를 대하는 정형인 배우자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습니다. 사랑의 반댓말은 무관심이라고 하는데, 아스피 배우자가 원하는 관계는 이러한 무관심과 같은 상태일 때가 많습니다. 정형인 배우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문제를 제기하지만 이 역시 늘 좌절되기 일쑤입니다. 이 과정에서 혼란스럽기도 하는데 아스피 배우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정형인 배우자를 위해 묵묵히 존재하고 (아무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감정 동요 없이 자신의 할 일을 하며 있습니다), 한눈도 팔지 않고 (아스피가 바람을 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정형인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정형인 배우자는 이미 그런 이유들 때문에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닐까, 자신의 이해심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기대치가 높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들로 (사실은 느낄 필요가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미 이렇게 벼랑 끝에 몰려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 간 부부상담에서 듣는 조언이 정형인 배우자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이는 정형인 배우자에게는 그야말로 독이 됩니다. 사실 정형인 배우자는 이미 더 노력할 기운도 사랑의 에너지도 별로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스피 배우자는 그렇지 않아도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역시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는 믿음을 굳히게 되고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해 나가야 하는 뉴로다이버스 커플에게 그럴 기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생각해 보면 남편의 아스퍼거증후군을 알지 못하고, 찾아갔던 일반적인 부부상담들에서 들었던 모든 조언들은 저를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든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돈, 에너지를 쏟아 부은 뒤 이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더더욱 나빠지고 내 마음은 더 공허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우울하고 불안해졌습니다.
남편의 아스퍼거증후군에 대해서 처음 제게 이야기를 해 준 부부상담사는 제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 분은 아스퍼거증후군과 그것이 커플사이에 발생시키는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제 이야기만 듣고 남편의 아스퍼거증후군을 문제원인으로 짚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 커플 상담을 이끌어갈 지식과 훈련을 받지 못했고 이는 경험이 있는 상담사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제게 일반적인 부부상담은 이제 더 이상 찾지 않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돈을 쓰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제게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 커플에게 해롭다고 말이지요.
다음 편에서는 뉴로다이버스 커플 전문가와의 커플 상담 경험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공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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